잠복 기리시탄이란?

1549년 예수회의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하였다.
자비에르는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하였다.
그 후, 자비에르의 후계자인 코스메 데 토레스,발타잘 카고, 루이스 프로이스에 의해서 기독교는, 큐슈와 서일본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1563년에는 오무라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되어,71년에는 남만 무역 지대로서 나가사키항이゙ 개항되었으며 오무라 스미타다는 1580년 예수회에 나가사키의 여섯 개 마을을 희사하여, 나가사키의 새로운 여섯 개 마을은 교회령이 되었다.
1587년 신부 추방령을 내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몰수하여 에도막부의 관할지로 하였다.
기리시탄의 존재를 경계한 에도 막부는 1614년에 기독교 금교령을 내려 일본에서 기독교를 전면 금지하였다.
교회 파괴와 선교사의 포박이 행해졌다.
에도막부의 관할지인 나가사키에는 나가사키 관아(奉行 부교)가 설치되었다.
나가사키 관아는 일반 신자를 포함하여 철저한 단속을 하였으며 후미에 제도(예수나 마리아의상을 밟게 함) 와 현상금 제도(기리시탄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지불), 오인조 제도(다섯명이 서로 감시하게 함), 테라우케 제도(절에 주민등록을 하게 함), 종문인별개 제도(불단을 모실 절을 등록하게 함) 등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나가사키 중심부에서 기리시탄은 사라졌다.
1644년경, 철저한 금교령 때문에 기리시탄은 사라졌다고 생각되었지만, 우라카미촌 야마사토의 기리시탄을 중심으로 쵸가타, 미즈카타, 키키야쿠, 세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조직을 만들어 신앙을 지켰다.
이 사람들을 “잠복 기리시탄”이라 불렀다.
쵸가타는 조직의 리더로, 공휴일을 정하는 「오쵸(장부)」를 관리하며 오라쇼(기도)를 전승하는 역할 이었다.
미즈카타는 세례를 내리는 역할이었다.
키키야쿠는 미즈카타의 조수로, 사와리야쿠 라고도 불리었다.
믿음의 도구로 사용된 관음상을 “마리아 관음상”이라 부른다.
일곱 세대 250년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기도를 하고 세례를 하여 왔다.
1865년에는 우라카미의 기리시탄은 막 완성된 프랑스 절(오우라 성당)의 프티쟝 신부에게 같은 신앙을 갖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것이 “신도 발견”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금지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정식으로 금지가 풀린 것은 1873년에에서 되어서였다.
현재는 종교 금지 시대의 기독교 신자를 “잠복 기리시탄”이라하여, 종교 금지 해제 후에도 기독교와는 다른 형태의 신앙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 가쿠레 기리시탄”과 구별하게 되었다.